미식축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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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미식 축구
19세기 영국의 럭비와 축구로 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미식축구는 미식축구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경기 방법과 규칙이 개선이 되어서 지금의 미식축구는 럭비나 축구와 전혀 유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지구상의 어느 운동도 따를 수 없은 인류가 만든 운동 경기중에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리 우는 "지상 최후의 스포츠" 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미식축구의 규칙은 계속 바뀌고 있는데 이에 대한 기본 방향은 (1) 공격과 수비으 균형, (2) 선수의 안전, (3) 관중들에 대한 흥미의 제공의 기여 등으로 나눌수가 있겠다.

우리나라에는 미식축구가 전파된지도 50년이 넘고 있으며 대학팀만도 34개가 되고 있지만 아직도 미식축구가 어떻게 탄생이 되었고 발전이 되었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 여기에서는 (1)대학미식축구의 탄생, (2)초기 출발 단계, (3)룰의 변천, (4)20세기 초반의 미식축구 발전, (5)2차 대전 후의 미식축구, (6)현재의 미식축구, (7)프로 미식축구의 발전의 순서로 소개하겠다.
대학미식축구의 탄생
1969년 11월 6일에 미국의 대학가에서는 미식축구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큰잔치를 벌린 적이 있다.
100년 전 이날은 바로 미국 동부의 뉴저지주 New Bruinswik에 있는 Rutgers 대학과 프린스톤 대학 간에 최초의 미식축구가 열린 날이기 때문이었다.
경기결과는 축구 스코어로 6:4로 Rutgers가 승리를 하였는데, 이 경기에서 양 팀의 선수들은 각각 25명씩이었고 볼은 단지 발과 어깨 그리고 머리로만 플레이를 할 수가 있도록 하였다. 물론 이 경기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경기를 하였으나 이 경기가 대학간의 첫 고식 경기였기 때문에 미국대학의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는 이 경기를 미식축구의 효시로 인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에 1870년대에 콜롬비아 대학이, 2년 후에는 예일대학이 이 대회에 동참을 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경기의 일관성 및 대회의 조직과 같은 것이 필요하게 되어 각 대학의 대표들은 1873년에 뉴욕시에서 모임을 결성을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각 대학의 선수들은 가능한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어 미식축구의 경기방법 및 규칙을 만들어 냈으나 근본적으로 축구(Soccer)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하버드대학은 앞의 4개 대학에 참여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볼을 잡고 전진을 할 수 있는 '보스톤 경기"라는 경기 방법을 발전시켜 상대를 할 팀을 찾고 있던 중에 1874년에 카나다의 McGill 대학에서 이 방식에 동조를 하여 3연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두 대학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하버드는 축구볼처럼 둥근 볼을 차고, 바운드된 볼을 들고 뛰는 방식을 선호하였으며, McGill 대학은 럭비볼로 경기를 하기로 주장을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첫 경기는 5월 4일 Cambrige 에서 Harvard 방식으로 열렸고 결과는 3:0으로 Harvard가 승리를 하였다. 다음날 2번째 경기는 McGill 대학 방식으로진행되었는데 0:0 무승부가 되었다.

이날 경기는 양 팀이 11명씩으로 하였는데 이유는 McGill 대학의 15명의 선수중 전날 경기에서 4명이 부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여튼 이 경기는 최초로 11명이 경기한 공식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Harvard 대학은 드롭 킥을 포함한 럭비 룰을 채택하였으며, 이해 가을 몬트리올에서 거행된 3번째 경기에서 승리를 하였다.

다음해 11월 13일 New Haven에서 Harvard와 Yale 대학은 룰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양팀 선수는 각각 15명씩, 운동장 규격은 사이드 라인이 140 야드, 폭이 70 야드로 하여 일대 격전이 벌어 졌는데 이 경기에서 50센트씩 내고 들어온 유료 입장객만도 2,000명이 넘는 것으로 기록 되었다.

1879년 11월 23일 매사스세츠주 Springfield에서 하버드, 예일, Rutgers, 프린스톤, 콜롬비아의 5개 대학 대표들이 모여 Intercollegiate Football Association(1895년에 해체됨)을 결성하였는데 경기 룰도 럭비와는 유사하지만 독자적인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 해에는 예일대학에 Walter Camp 라는 신입생이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후에 그는 미식축구경기의 조직화와 룰의 미국화(Americanization)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1889년에는 최초로 All - American을 선발하여 미식축구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다.
초기의 발전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의 미식축구는 영국의 축구식에서 출발하여 럭비식으로 전환되어 발전되어 오던 중, 미국식 경기로 방향이 전환되기 시작한 때는 1880년 부터이다.

이때 처음으로 Scrimage Line이 경기에 도입되고, 경기장도 길이 110야드, 폭 53 ⅓ 야드로 좁혀지고, 선수도 11명으로 줄어 들었다. 또한 스크리미지 라인은 자연히 Quarter Back(처음 Snap을 받는 선수)을 탄생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여러가지 작전과 Signal System이 경기에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1882년에는 경기를 빨리 진행시키기 위하여 3번의 Down에 5야드 전진 제도가 룰로 제정이 되었는데, 주 원인은 1881년과 1882년에 프린스톤이 예일과의 경기에서 소위 "Block Game" 이라고 불리우는, 비기기 위하여 볼을 가지고 전진하려고 하지도 않고 시간을 끄는 전술을 사용함에 따라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1883년에는 Camp 의 주도하에 당시의 골 당 1점씩인 럭비의 득점 방식을 버리고 Touch Down은 2점, Try for Point는 4점, Field Goal은 5점, Safety는 1점의 방식을 채택하였으나 이듬해에 Touch Down을 4점, Try for Point 와 Safety를 2점으로 수정하였다. 미식축구의 전파과정을 보면 초창기에는 소위 "Ivy League"라고 하는 동부자역에서 한정되어 있다가, 1887년에 남부의 Virginia Military Institute 와 William and Mary 대학이 시작하였으며, 2년 후에는 Michigan 대와 위스컨신주의 Racine 대학이 중서부 지역에서 처음으로 대학간의 경기를 시작하였다. 또한 태평양 지역에서는 California 대학이 1886년에, 남서부에서는 Texas 대학이 1893년 부터 미식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경기스타일은 매우 거칠어 한마디로 "야만적인 경기"로 불리웠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앞의 수비를 밀치고 볼을 잡고 전진하는 것이 주요 작전이었다. 물론 선수 교체는 허용되지 않았고, 한 주일에 한번 이상의 경기도 보통이었다.

이 당시 강팀으로는 동부의 예일, 하버드, 프린스톤, 펜실바니아 등을 꼽을 수 있었지만 1890년대에 들어서서는 중서부 지방의 미시간, 시카고, 미네소타와 같은 대학들이 동족의 세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특히 시카고대학의 Amos Alonzo Stagg 감독은 1892년 부터 40여년간 재직하면서 Reverse Play, man in Motion, Unbalanced Offence Line, Lateral Pass의 작전 개념을 도입하여 탁월한 성적을 올렸고 아울러 최초로 그림을 삽입한 미식축구의 전략과 경기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룰의 변천
미식축구가 젊은 학생과 팬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있는 스포츠였으나 한편으로는 교육자와 학부모들에게는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 되고 있었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미식축구는 이상하리 만치 거칠어 졌으며 따라서 많은 사망자와 평생의 불구자들을 양산하였다. 이미 콜럼비아대는 럭비로 전환하였다.

1910년 당시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자신이 미식축구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각 대학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Inter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1910년에는 National Collegiate Athietic Association 으로 바뀜)과 American Intercollegiate Football Rule Committee(현재 NCAA의 산하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이 조직의 주관하에 이듬해부터 Hurding, Mass Formation과 같은 위험한 플레이와 작전은 금지되기 시작하였다.

반면 Forward Pass 플레이 같은 넓게 펼쳐지는 경기가 합법화 되었다. 또한 경기 시간도 70분에서 60분으로, 심판의 수도 3명에서 4명으로 변경하였다.

1912년에는 양측 골라인 간격을 100 야드로 줄였으며 골라인 후방에 10 야드 앤드죤을 새로 추가하여 포워드 패스에 의한 캐치도 터치다운으로 인정하였다.

공격 시리즈도 4번의 공격에 필수 전진거리를 5 야드에서 10 야드로 변경하였고(패스 플레이의 합법화에 따른 공격횟수 및 전진거리의 추가), 득점도 터치다운의 경우 6점으로 올렸다. (이미 1909년에 필드골은 3점으로 줄었음)
1900 년대의 발전과정
새로운 룰의 적용에 따라 미식축구 스타일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포어드 패스가 없었던 이전의 전형적인 런닝백은 좁은 지역에서 힘과 돌파력을 가지고 밀고 나갔으나, 포어드 패스에 대비한 넓은 지역의 수비 때문에 런닝백은 스피드와 유연성 그리고 순발력을 갖추어서 독주가 많이 나왔으며, 따라서 관중들의 흥미도 더욱 많아졌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선수로는 인디언 출신인 Jim Thrope 를 들 수 있다.

1913년에는 노틀댐 대학의 QB Gus Dorais와 End Knute Rockne 의 환상적인 포어드 패스 플레이는 이 대학을 일약 미식축구의 강호로 부각시켰다. 이들은 독자적인 자신들의 패스 플레이를 고안하여 엄청난 연습으로 둘만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냈으며 이후 미식축구에서 패스 플레이가 보편화 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이전의 미식축구는 둔탁한 탱크와 저돌적인 보병에 의한 전쟁이라면, 이후 부터는 여기에다 빠른 기계화 부대와, 공군이 가세된 보다 복잡한 전쟁으로 바뀐것이다. Rockne는 졸업후 모교의 코치로 존재하면서 패스 플레이를 더욱 발전시키었는데, 1918년에서 1931년 사이에 그의 전적을 보면 105승 5무 12패 이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 각 대학에서 배출되는 수많은 스타들은 관중의 흥을 더욱 높이고 있어, 바야흐로 미식축구는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유명한 스타로는 스탠포드 대학의 Ernie Nevers, 노틀댐의 George Gipp, 미네소타의 Bronko Nagurski, 일리노이 대학의 Red Grange 를 꼽을 수 있다.

1930년대의 강팀으로는 미네소타 대학을 들 수 있는데 이 대학은 1934년에서 1938년 사이에 4번의 Big 10 타이틀을 획득하였을 뿐 아니라. 1936, 1940. 1941년에는 전국 타이들도 차지 하였다.
2차 대전 후의 미식축구
세계 2차 대전은 미국의 대학 미식축구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놓고 말았다.
전쟁을 계기로 육사와 해사는 특별 장교 훈련 프로그램에 미식축구를 접목하여 대학 미식 축구 Super Power로 등장하였다.

1944년과 1945년에 West Point 출신이 4명과 5명이 각각 선발되었다.
1941년에 이미 심판의 허가 없이도 자유로운 선수교체가 허용된 바 있으나 이에 대한 가치를 잘 모르고 있었다.
1945년에는 약세의 미시간 대학이 육사를 맞이하여 공격과 수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선수전원 교체시킨 결과 비록 지긴 하였어도 상당히 근접한 경기를 하였다.

이후 모든 대학이 공격과 수비를 나눈 시스템으로 전환하였으나 많은 논란 끝에 1953년에 선수의 자유 교체는 다시 금지 되었다.
이 룰은 1960년대에 이르러 프로 축구와 경쟁을 위하여 다시 부활하였다.

1950년대에 이르러 대학 미식 축구의 판도는 오클라호마 대학으로 넘어갔다.

오클라호마 대학은 1950, 1955, 1956년에 3번의 내셔널 챔피언 을 획득하였고, 1953년에서 1957년 사이에 47연속 승리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는 전설적인 Paul (Bear) Bryant가 이끄는 알라바마 대학이 1961. 1964. 1965 에 걸쳐 3번의 내셔널 챔피언을 차지하였다.
현재의 대학 미식축구
1980년대의 대학 미식축구 선수들은 이전의 선수보다 보다 크고, 빠르며 전문화 되어 있으며, 이러한 우수한 선수들은 여러 대학으로 균등하게 분포되어 몇몇의 대학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더욱이 매스컴의 발달로 대학의 스타는 곧 졸업 후 백만 장자의 지름길이기 때문에 예전의 만능 선수 시대에서 몇 가지만을 집중 훈련하는 선수들의 전문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마디로 미식축구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 선수들은 잘 돌아가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경기의 수준은 더욱 높아지고, 또한 관중의 수준도 높아 이전의 스타는 공격선수 일변도였으나 수비선수도 떠오르고 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수비 스타로는 매릴랜드 대학의 Randy White, Penn State 의 Jack Ham, 공격 스타로는 Brigham Young QB Steve Young, Pittburgh 의 Tony Dorsett, Georgia 의 Herschel Walker 를 들 수 있다.

규칙은 프로팀과의 직, 간접적인 경쟁 때문에 공격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어지고 있으며, 매스컴과 관계된 룰이 많이 삽입되고 있다. 따라서 경기의 수입도 상당하여 많은 대학들은 미식축구로 벌은 돈을 그 대학의 비인기 종목의 육성에 투자하는 상당히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정규시진의 경기 방식은 지역별로 조직된 Conference 별로 상호 리그 방식으로 Champiom 을 결정하며, 정규시즌 후에는 Post Season 경기로 Conference의 Champiom 들을 두 팀씩 초청하여 소위 "Bowl Game"을 벌리고 있다.

미국내에 유명한 컨퍼론스로는 Big 12, Big 10, Southeastern, ACC(Atlantic Coast Conference), Atianaic Coast, Ivy Leagu 를 들 수 있고, 반면 노틀담, 해사 등과 같은 대학은 아무 곳도 속하지 않은 소위 "Independent"들도 있다. 또한 유명한 Bowl 경기로는 Orange Bowl(마이아미), Suger Bowl(New Orleans), Cotton Bowl(Dallas), Rose Bowl(Pasadena), Fiesta Bowl 등을 꼽을 수 있다.
프로팀의 탄생
프로미식축구의 탄생은 19세기말 펜실바니아 서쪽의 조그만 시골에서 시작이 되었다.

대학시절의 스타들이 모여서 조그만 시골의 클럽팀들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출발은 매우 느슨하였지만 곳곳에서 팀들이 창단 되었으며 그 후 약 5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서서히 발전을 하게 되었다.

1950년에 이르러 프로팀은 대학 미식축구팀들과 인기 면에서 대등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특히 TV의 출현은 프로 야구와 더불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이제는 어느 운동도 이를 따를 수 없는 세계적인 스포츠가 되었다.
최초의 프로팀
미국 최초의 프로 미식축구팀들은 펜실바니아의 Latrobe, Greensburg, Jeannette 등과 같은 공업도시에서 창단이 되기 시작했다. 주로 대학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선수로 모집이 되었으며 도시간에 경쟁 의식이 점점 커지면서 새로운, 좋은 선수들을 경쟁적으로 스카웃 하기 시작했다.

Latrobe에서는 YMCA가 스폰서를 했었는데 선수들의 시합경비는 물론이고 매 경기당 10 달러씩 지급을 했다.
프로팀의 최초의 경기는 1895년 8월 31일에 Jeannett와 Latrobe 간의 경기로 열렸는데 Latrobe 가 12:0 으로 승리를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후로 다른 팀들에도 스폰서가 경쟁적으로 생기기 시작했으며 1897년에는 Greensburg 와 Latrobe 의 경기를 보기위해 5,000명의 유료 입장객이 몰려 들었다.

이때 Latrobe에는 프린스톤 대학의 전미국 올스타 앤드 Thomas Trenchard 가 75달러를 받았고, Greensburg 에서는 Lafayette 대학의 공격 백들을 모두 스카웃을 했던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다.

그 후 몇년간 프로팀들은 피츠버그 (Duquense Club), 필라델피아, 뉴욕, 오하이오, 인디아나 등에서 나타나기 시작을 했는데 특히 Duquense 에는 많은 대학의 스타들이 집결을 했었다. 또한 뉴욕 북쪽으로도 몇몇의 프로팀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 유명했던 팀이 버팔로와 시러큐스이다.

특히 시러큐스에는 Pop Waner와 그의 동생 Bill(모두 코넬대 출신)이 활약을 했었는데 필라델피아 내쇼날팀과 최초의 실내경기(뉴욕의 메디슨 스퀘어가든)로 열려 9:6 으로 승리를 하였다.

오하이오주에서는 도시간의 경기와 근대의 리그의 중간 단계의 경기들이 열리곤 했는데 Canton, Massilon, Columbus, Akron 등이 주로 대학시절의 스타 플레이어를 모집하여 활동을 했었다.

특히 Canton의 Wille Heston(미시간대 출신)은 경기당 500 달러를 받았는데 이 선수의 급료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이때 활약을 했던 선수로는 Carlisie Indian School 출신의 유명한 인디안계인 Jim Thorpe가 있다.

이 당시 경기는 매우 거칠었는데 어떤 수수는 유니폼 안에 철판을 대고 경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부상자들이 속출을 하였다. 승리에 대한 경쟁의식이 커지면서 어떤 경우에는 매우 추악해지기 까지 했는데 이에 따라 조직은 유명 무실해 졌으며 당시의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를 않고 있다.

이에 따라서 심지어는 1914년 이전까지 만해도 대학의 코치들이 앞장을 서서 프로팀을 반대를 했으며 자기 팀의 졸업생들에게 프로팀으로 가지 말도록 하곤 했다.1차 세계대전이 끝이 난 후에 프로팀의 팬들은 급감 했는데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조직이 필요로 하고 있었다.
NFL의 탄생
1920년 9월 17일 Canton 자동차 대리점 사무실에서 11개의 팀 대표들이 모여서 Amreican Professional Football Association(APFA)이 결성이 되었는데 회장으로는 Jim Thorpe가 선임되었다.
가입비(franchise)는 100달러 이었는데 팀들은 다음과 같다.

Canton, Cleveland, Dayton, Akron, Massillon, Rock island 이상 6개팀은 오하이오즈, Decatur(현 시카고 베어즈의 전신), 시카고(현 아리조나 카디날즈) 이상은 일리노이주, Hammond, Muncie 이상은 인디아나주, 그리고 뉴욕주의 Rochester 등이다. 따라서 NFL은 Canton 을 현 프로팀의 요람으로 인정을 하고 있는데 NFL 명예의 전당에는 Canton 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The Pro Football Hall of Fame, dedicated in 1963, is here." 그러나 APFA는 매우 조직이 느슨하여 1921년에 다시 정비를 하여 Joe F. Carr가 회장으로 취임을 하였고, 새로운 팀으로는 콜럼버스, 신시네티, 디트로이트, 버팔로, 그린베이가 가입을 하였고, 동시에 Massillon, Hammond, Muncie는 탈락 되었다. 또한 협회 이름도 오늘의 National Football League(NFL)로 개정이 되었다.그리고 회장인 Carr는 1939년 타계할 때까지 NFL을 이끌었다.

이후 10여년 동안 NFL 팀들은 새로운 팀이 생기고 기존의 팀이 없어지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제까지 연고지를 유지하고 있는 팀은 시카고의 베어즈와 그랜베이 팩커즈 뿐이고 시카고 카디널즈는 세인트루이스를 거쳐 아리조나로 연고지는 옮겼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팀이다.

이 당시 베어즈와 캔톤이 NFL의 강팀으로 군림을 하였지만 진정한 NFL 챔피온은 없었다. 서로간에 경기를 전부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NFL의 전기가 마련된 것은 1925년 일리노이 대학의 하프백으로 스타 플레이어인 Red Grange의 시카고 베어즈의 입단이었다.

시카고의 Wrigley Field에서 카디널즈와 벌린 그의 데뷔전에는 그의 플레이를 보려고 무려 36,000명의 입장객이 들어 찼으며, 다음주 뉴욕의 폴로 경기장에서 열린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는 무려 68,000명의 관중 동원을 기록했다.
1935년 Grange가 은퇴를 할 때가지 그의 기록을 깨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1945년 까지의 성장
1930년대의 경제공황은 프로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12년 연속 승리 시즌(승률이 50% 이상이면 승리 시즌이라고함)을 기록한 그린베이만은 인근 지역민들의 강력한 지원에 의하여 유일하게 어려움을 못 느끼고 있었다.

19933년에 NFL은 10개로 축소가 되었고 5개 팀씩 2개의 리그를 나누어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17일 최초로 리그 우승팀 기리 챔피온 결정전이 시카고에서 열렸는데 시카고 베어즈가 Grange 와 Bronko Nagurski의 활약으로 뉴욕 자이언츠에 23 : 21로 승리를 하였다.
Grange의 출현은 대학 스타들에게도 미식축구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이후로는 Bennny Friedman(QB)는 10,000달러, Chris Cagle(HB)는 7,500 달러를 받고 프로로 입단을 하였다. 좋은 선수의 확보는 바로 팀의 승리이고 또한 관중을 동원하는 매개체임을 알고 부터는 선수의 스카웃이 매우 심해 졌는데 이에 따라 드래프트 시스템이 1935년 부터 실시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에 NFL에 가장 크게 기여를 했던 사람은 베어즈의 감독 George Halas 이다. 그는 당시에 유행했던 Single wing 포메이숀을 압도하는 T 포메이숀을 개발하였는데 후에 모든 프로팀과 대학팀에서 유행을 하게 되었다. 2차 대전 기간 중에 NFL은 상당히 위축은 되었지만 중단은 없었다. 약 600여명의 선수들이 입대를 함으로 선수수급이 문제가 되어 필라델피아는 1943년에는 피츠버그와 연합으로 시합에 출전을 하였고, 1944년에는 클리브랜드 램즈와 연합으로 출전을 하기도 하였다.
전후의 도약
승전 무드에 편승하여 NFL은 힘찬 도약을 시작하였는데 1946년 12월 뉴욕에서 열린 NFL 선수권대회에서 시카고 베어즈는 자이언츠를 24:14로 물리쳤는데 이때 관중은 58,346 이었다.

승리 팀의 선수에게 2,000 달러식 보너스가 지급이 되었다. 또한 이 해에는 대학으로 부터 배출되는 많은 선수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리그인 AAFC(All America Football Conference)가 결성이 되었다.

이때 생긴 팀들이 브룩클린, 뉴욕, 버팔로, 시카고, 클리블랜드, 마이애미, 샌프란시스코 등인데 가장 괄목한 팀은 Paul Brown이 감독겸 구단주를 겸임한 클리블랜드 팀이다. 클리블랜드는 4년간 52승 4패 3무로 4회에 걸쳐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NFL 과 AAFC 양대 리그는 치열하게 경쟁을 벌리다가 클리블랜드, 샌프란시스코, 볼티모아만이 살아남아 NFL로 합류를 하게 되었고, 나머지느 해산 후에 타 NFL 팀으로 흡수가 되었다.

이때가 1950년이다. 한 시즌이 지난후에 NFL은 다시 12개 팀으로 구조조정이 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뉴욕 Yanks(후에 달라서로 옮긴 후에 다시 볼티모아로 옮김), 시카고 카디날즈, 클리블랜드 브라운즈, 뉴욕 자이언츠, 필라델피아 이글즈, 피츠버그 스틸러즈, 워싱턴 레드스킨즈, 시카고 베어즈, 디트로이트 라이온즈, 그랜베이 팩커스, LA 램즈, SF 49ers 등이다. 관중의 입장 인원도 폭발적으로 늘어 1952년에는 2백만이었는데 1958년에는 3백만으로 증가를 했으며 또한 TV 시청자가 수백만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한때 프랜차이즈비가 100달러 였으나 60년대 초에는 이미 수백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60년대의 성장기
60년대 초반에 NFL은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을 했는데 바로 AFL의 등장이다. 2차대전의 전쟁영웅 전 사우스다코다 주지사이며 백만장자인 Joe Foss가 8개의 도시에 새로운 미식축구 리그(American Football League)를 만든 것이다. 바로 뉴욕 타이탄즈(후에 Jets로 변경), 로스앤젤레스(후에 샌디아고로 이전), 달라서(후에 캔사스시티로 이전)가 생겼으며 NFL로 부터 분리 된 보스톤 패트리오츠(현 뉴잉글랜드), 버팔로 빌즈, 댄버 브롱코즈, 휴스톤 오일러즈(테네스로 이전), 오클랜드 레이더즈 등이 합세를 하여 NFL의 기세를 누르고 있었다. 관중들은 좋은 선수가 있는 곳으로 몰리기 마련이다.

양대 리그는 대학의 우수 선수 확보에 혈안이 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조 네이머스가 40만 달러에 NY 젯트에 계약을 한 것이다. 마침내 양대 리그는 1966년에 서로 통합을 발효하게 되었다. 모두 26개 팀이 13개씩 양 리그로 나누어 경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67년에 양 리그 우승팀 끼리 겨루는 제 1회 슈퍼볼을 열리게 되었고 빈스롬바르디가 지휘하는 그랜베이 팩커즈가 캔사스시티를 물리치고 제 1회 슈퍼볼 우승을 차지 하였다.

그린베이는 제 2회 슈퍼볼에도 오클랜드를 누리고 승리를 차지하였다. 이때 그린베이는 명장 빈스롬바르디 외에 전설적인 쿼터백 바트스타, 풀백 짐 테일러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있었다. 그린베이는 그후 롬바르디 감독의 퇴임 후에 하강곡선을 그리다가 1997년 제 31회 슈퍼볼에서 마이크 홈그랜 감독의 지휘와 쿼터백 브랫 파버의 활약으로 다시 우승을 하게 된다.
90년대 호황기
이후 NFL은 2차례 더 진통을 격게 된다.

70년대 초반 WFL(World Football League)의 출현과 80년대 초반의 USFL의 출현, 90년대의 XFL의 출현이었다.

그때마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새로 생긴 리그를 무력화 시켰는데 70년대 초반에는 시애틀과 탬파베이가 새로 가입을 하였으며, 1996년 에는 잭슨빌과 캐롤라이나가 가입을 하여 현재 32개 팀이 AFC 와 NFC로 구분이 되어 호황을 누리고 있다. NFL은 기술이 늘어 나면서 동시에 체격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공격라인맨은 80년대만 하드라도 300 파운드면 매우 큰 체격이었지만 이제는 350파운드는 보통이다. 예전에는 쿼터백은 정확하고 긴 패스를 잘하면 되었지만 요즘은 쿼터백도 빨라야 하고, 짧은 패스와 수비진을 흔들 수 있는 공격 패턴으로 바뀌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샌프란시스코의 죠 몬타나, 스티브 영의 공격 스타일인 West Coast Offence를 들 수가 있다. 이제 미식축구는 미국만의 스포츠가 아니다. NFL의 산하 리그인 유럽 NFL이 있으며 1998년 9월에는 IFAF(International Federation of American Football)이 결성이 되어 제 1회 월드컵이 1999년에 열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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